또 아가씨가 멋대로 밖에 나갔다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위험하니까 그렇게 혼자 나가지 말라고 말했거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장 아가씨의 방으로 향했다. 나답지 않게 발소리가 쿵쿵 울린다.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뭐가 급하다고. 그녀의 방문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문에 손을 대니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결. 결이지? 들어와."
아직 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나라고 단정 짓고 들어오라고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밖에 서 있는 게 내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홧김에 나도 모르게 문을 거칠게 열어버렸다. 미닫이문이 힘없이 드르륵 열리며 쾅 소리를 냈다. 문 너머에는 막 나갔다 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구석에 널브러진 겉옷과 밖에서 무엇을 사 왔는지 무언가 바닥에 물건이 주욱 늘어져 있었다.
"아가씨."
"있지, 결. 이것 봐봐. 색이 참 곱지?"
내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결 좋은 비단을 들어 보여주며 생긋 웃는 그녀를 보니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방문을 닫고 물건을 밟지 않도록 조심히 들어가 비어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은 꼭 뭐라 한마디 하리라.
"아가씨, 혼자 나가지 마시라고 몇 번을 말씀 드렸죠?"
늘어놓은 물건을 차근차근 정리해 넣으며 글쎄, 몇 번이었더라. 너무 많이 들어서 기억이 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니 다시 현기증이 나는 것만 같다. 어째서 이렇게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걸까.
"연 가문은 요괴를 다루는 술사의 가문입니다. 가문을 싫어하는 요괴도, 인간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래, 알고 있어."
문제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하는 그녀는 어느 정도 물건을 정리했는지 나와 마주 앉으며 웃었다. 그녀는 정말 알고 있는 걸까. 밖에 혼자 나갔다가 나쁜 생각을 하는 인간에게, 요괴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에 적어도 저를 데리고 나가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녀는 웃고 있던 얼굴을 조금 구기며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렇지만, 결을 데려가면 이것도 하지 말아라, 저것도 하지 말아라. 거기는 가면 안 된다. 자기 옆에만 딱 붙어 있어라. 너무 시끄러운걸.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시면 어쩌시려고...!"
"그럼 결이가 구하러 와주겠지."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잖아.
물론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제가 구하러 가겠지만, 그런 위험을 애초에 만들지... 언쟁이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할 그즈음, 그녀는 아직 정리해 넣지 않은 것 중 하나를 집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네 생각하면서 산 거야. 라는 말을 덧붙이며. 인상을 찌푸려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자 왜? 싫어? 받아주지 않을 거야? 라며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 아아. 이래서 나는 늘 아가씨에게 지고 만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어보니 그 안에는 기다란 장죽이 있었다. 영문을 몰라 그녀를 다시 한 번 바라보니,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선물이야. 라고 말했다. 내가 그녀를 모시기 시작한 지 15년이 되었다며. 지금 쓰고 있는 것은 버리고 이걸로 써 달라고. 나는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소중히 잘 쓰겠다는 말 밖에는. 선물을 받아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던 일주일이었지만, 꼭 어떻게든 나가고 싶다는 아가씨의 부탁을 받고 같이 밖으로 나갔다가 인간들 사이에서 묘한 소문을 들었다. 요괴를 싫어하는, 반 요괴 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요괴보다 인간이 먼저 움직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날의 산책은 일찍 접어야 했다.
그 뒤로 저택 안은 비상사태였다. 저택 주변의 순찰을 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들어왔다 나가는 모든 사람의 검문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녀에게는 이번만 제발 부탁이니 홀로 돌아다니지 말아달라 이야기를 했더니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여느 때와는 달리 조용히 지내주었다. 그대신 심심해할 그녀를 위해 얼굴을 보러 자주 찾아갔다.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말 상대를 해주고 싶었다. 내가 말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뭐든 이야기를 하니까 들어주는 상대정도는 되겠지.
그 날도 나는 그녀의 방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 다음 따뜻한 차와 과자를 조금 챙겨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 웃으면서 맞아주는 그녀에게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는 뭐든 즐거웠다. 어느 날은 읽었던 책에 대한 내용을 말해주며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며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믿을 걸 써야 한다며 화를 내기도 했고, 어느 날은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여행을 해보고 싶다며 눈을 빛내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날도 있었다. 오늘은 최근 나오는 반찬들이 맛없는 것뿐이라는 불평이었지만, 내가 가져온 과자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것도 그것 나름 들어줄 만 했다.
한창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있는데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재. 불이 난 모양이다. 다행히 이곳과는 좀 떨어져 있는 곳에서 불이 나 여기까지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어딘가 불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밖은 계속 소란스러웠다. 물을 가져오라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비명도 들렸다. 문밖의 복도에서도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가서 일손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엉거주춤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결, 잠깐만 이리로 와봐."
잠시 어쩔까 망설였지만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는 올곧은 시선에 문에서 떨어져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입을 꾸욱 다물더니 소매에서 대나무 통을 꺼내 들었다.
"아가씨, 그건..."
내 대나무 통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꺼내지 않는 그 대나무 통은 이미 창고에 들어간 지 10년 이상이 된 것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언제 창고에 들어가서 그걸 찾아왔는지. 놀랍기도 했지만 당황스러웠다. 이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미안."
그녀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품속에 있던 부적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도 요괴 술사의 딸이었지. 그녀가 너무 해맑게 밖의 소녀들과 같이 웃고 다니던 터라 잊고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던 다급한 발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비명에 섞여 여러 가지 다른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아차 싶었다. 바보같이 뭘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거지. 급하게 그녀가 들고 있는 부적을 뺏어 들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녀의 따뜻한 미소. 그것이 내가 마지막에 본 것이었다.
바깥의 소리가 내게 들리지 않고, 내 목소리 역시 바깥에는 닿지 않는다. 그냥 조금 험하게 움직이고 있구나. 딱 그 정도만 느껴졌다. 무슨 봉인을 이렇게 꼼꼼하게 해놓았는지 그녀의 용의주도한 준비에 한숨.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하루는 지나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 이곳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 전 엄청난 충격이 대나무 통을 통해 나에게 전해져왔다. 역시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몇 번이고 입구에 몸을 부딪쳤다. 점점 이곳을 막고 있는 힘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내 역할은 그녀를 지키는 것이었건만, 왜 대나무 통 안에 있는 건지. 들짐승이라도 좋아. 지나가던 요괴나 사람이어도 상관없어. 빨리 누가 여기 붙어있는 부적을 떼어줬으면. 나는 알고 싶었다. 최악의 상황을 보게 된다 하여도 나는 알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을 부딪치건 내 기대를 저버리고 열리지 않았다.
-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올려 떴다.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급한 빛에 눈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나는 서둘러 그곳에서 얼른 밖으로 나왔다. 내가 마지막에 있던 장소는 분명 저택의, 아가씨의 방이었을 텐데. 내 눈앞으로 펼쳐지는 건 산속이었다. 나무는 울창하게 하늘을 덮어 초록색 빛을 내리고 있었다.
주변을 급하게 둘러보며 뛰어다니다가 저택의 뒤편에 있는 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가씨가 몰래 내 눈을 피해 마을에 내려가던 산길. 저택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숨이 차오르는 것도 모르고 앞만 보며 올라갔다. 몇 번이고 미끄러워 넘어질 뻔했지만 올라갔다. 그렇게 힘겹게 찾은 저택은 불에 탄 흔적과 함께 원래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후에 마을에 내려가 보았다. 적당히 삿갓 같은 것을 주워 쓰고 얼굴을 가렸다. 이곳에는 내 얼굴을 아는 이도 흔할 테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이것저것 사람들에게 묻고 이야기를 들었다. 벌써 저택이 저렇게 된 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고 했다. 누구 하나 살아남은 이도 없다고 했다. 요괴를 길러서 벌을 받았다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품에 있는 장죽을 꺼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불을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그곳을 떠났다.
뿌연 연기가 하늘을 향해 퍼져갔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가뒀는지도 짐작은 간다. 그게 내 바람이 아니었어도 그녀는 날 살리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리고 난 돌아갈 곳을 잃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 언젠가 네가 말했던 바람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 좋겠어. 너는 시끄럽고 활력이 있는 곳을 좋아할 테지만 난 조용한 곳을 찾아 다닐 거야. 네가 나를 생각하지 않고 저질러 이렇게 된 것이니 이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네게 받은 장죽 하나 들고, 허리춤에 대나무 통 하나 달고서. 발이 닿는 대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이야기해줄게.
내가 보고 만났던 이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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